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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숲에 갔다


편혜영의 책을 읽을 때면 책이 주는 어떤 불안함과 긴장감때문에 심장이 뛴다. 그래서인지 그 여운이 오래 간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어서 긴장감과 불안이 더 강했던 책이다. 다만 추리소설이라고 부르기는 좀 어렵다. 결국 확실한 형태의 비밀이란 것이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기 때문이다.적어도 나는 읽는 동안에, 사람사이에 숨겨진 이면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또 주체적인 나 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결국 과거와,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들이 현재를 만드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과거에게서도, 사람에게서도 초연한 나인 것처럼 굴지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의 총집합인 셈일 뿐이다.읽는 사람마다 감상이 다양할 것 같은 책이다.서사나 문장도 모두 다 만족스러웠다. 역시나 좋다.p122그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들어온 말 중에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게 있었다. 어머니는 형의 편을 들기 위해 그 말을 편의적으로 사용했지만, 그는 어떤 일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상관없어 보이는 여러 가지 일들의 연쇄가 전제되어 있다는 걸로 그 말을 받아들였따. 따라서 상황을 하나만 바꾸는 식의 가정은 도대체가 무의미했다. 그럼에도 이하인은 자신이 바닥에 나뒹군다고 생각한 짧은 순간, 그 길고도 가망 없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p208 꿈이라니. 어린 시절 농구를 잘하고 싶다는 꿈을 가져본 이후로 뭔가를 절실히 바라본 적이 없고 이루고 싶다고 소망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박인수는 고개를 끄덕였따. 꿈이라는 말이 주는 진정성이나 순수한 울림에 속고 싶지 않았다. 꿈이라는 건 원래 그렇게 시시하고 속된 것인지도 몰랐다.
한국문학의 중추, 작가 편혜영, 다섯번째 책. 이 소설은 숲에 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들이 전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숲이 복잡하고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막막한 곳임을 점차 깨달아가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사실 그런 곳은 숲뿐이 아니라는 걸, 의심과 불안이 잠식하는 한 우리가 사는 곳은 그게 어디이든 애당초 그렇다는 걸 말하고 있다.

무대는 서울에서 400여 킬로미터, 차로 달려 네 시간 거리쯤에 위치한 숲이다. 이번 이야기는 이 숲에 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하늘과 공기와 대지를 잠식하고 어둠과 일체를 이룬 숲. 복수이자 한 덩어리의 전체로 존재하는 숲. 차고 거친 정적과 짙은 그늘 속에 교교한 바람 소리, 모호한 짐승 소리, 사방을 살피는 부엉이의 울음소리로 가득한 숲이다. 이 숲에 실패한 자제력과 반복되는 결심, 실재 없는 감각의 환영에 시달리는 한 사내가 들어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번 작품에는 분명한 사건의 전조와 등장인물 개개별 성격, 그들 관계의 형성을 낳고 엮는 데 앞서 우리가 접했던 그 어떤 편혜영의 소설들보다 대화문이 풍부하게 실렸다. 대화를 이어가는 한 단락 안에서 인물 화자가 교차하면서 심리 변화의 추이가 미묘하게 얽히고, 고조되는 갈등과 불안의 진폭은 읽는 이를 숨 가쁘게 한다. 갈등이 고조되고 종국에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버린 폭력으로 치닿는 과정 역시 이러한 대화의 과정에서 벌어진다. 현재의 모순과 패배를 이미 예고했던 과거의 불행과 습관은 인물들을 옮겨가며 그 어떤 외부의 폭압보다 거세게 작동한다. 짙고 거대한 숲과 그 속에서 퍼져 나오는 듯한 음습한 기운과 소음은 어쩌면 극도의 자기모순과 자아 분열, 순간적인 격분과 반복된 자기의혹에 매몰되는 우리 안의 소리일지도 모른다.


1부
2부
3부
에필로그

해설: 세계의 일식이 지나고 - 권희철